문화 탐방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경복궁(慶福宮)

야정(野停) 2006. 12. 22. 18:25
경복궁,우리나라 궁전 중 으뜸이랄 수 있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하여 봅시다.연구가는 아니지
 만 그래도 한번은 생각해 보자는 말씀이죠. 
 우선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본 경복궁. 
 먼저 마주하는 것이 광화문 아니겠어요? 
 우리의 국권을 일본에게 빼았겼으니 정궁을 제대로 보존할 
 수가 없는 법, 광화문(光化門) 역시 파란만장한 세월을 간직
 하고 눈물깨나 흘린 비운의 유적이라 할가? 
 임진왜란 때 궁궐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소실되었으니 광화
 문이라고 온전하였겠느냐 이말이죠. 
 소실된 광화문을 고종 때 흥선대원군께서 중건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세우기 위해 지은지 60년도 못
 된 광화문을 동북쪽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것도 한 일본인이 헐리는 것을 극구 반대해 겨우 옮겨놓은 
 것이죠. 
 (죽일 놈들이죠? 남의 집 대문을 제 마음대로 헐어버리다니!) 
 그렇게 유지되던 광화문이 6.25 전쟁으로 그나마 형체까지 
 불타 없어졌습니다. 
 박정희시대에 와서 남은 석축으로 다시 지금 자리에 복원을 
 시켰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철근 콘크리트로 경복궁 내 궁궐들의 기본 
 축과는 3.5˚ 비틀리게 복원한 것입니다. 
 최근에 다시 복원한다고 해체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광화문으로 통해 경복궁을 들어가지않고 양 옆으로 
 돌아 들어 가게 되는데 그 안에 매표소를 만들어 놓았습니
 다. 들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잔디밭으로 꾸며놓은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명지대학교 홍순민 교수님의 말씀대로 사람 사는 곳에는 
 잔디를 심지 않는것이 우리의 조경법이라 하는데 일인들이 
 궁궐을 헐고 허전한 곳을 덮느라 잔디를 심은 것이지요. 
 광화문 뒤 광장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흥례문-근정문-근
 정전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흥례문 앞 광장에서 근위대 교대식을 거행하는데 그 자체
 도 무형문화재감이 되더군요.

근위대 교대식
 
교대식이 끝나는 것을 보고 흥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
가니 개천이 가로 질러 있었습니다. 
이 개울은 일부러 방향을 돌려 만든 것으로  금천이라 하
고 영제교라는 넓은 다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홍 례 문
 

오른쪽 이미지가 김영택 화백 그림

금천에는 물을 따라 들어오는 온갖 잡귀를 막는다고 천록
(天鹿,天祿)이라는 가상의 동물을 네곳에 각각 1마리씩 
조각하였는데 몸돌과 함께 통째로 조각된 것이 금방이
라도 물로 뛰어들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더라구요.
(정말 살아서 물로 뛰어들 것 같더라니까.)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을 통과하니 넓은 조정(朝廷)이 
불규칙한 박석으로 덮혀져 우리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근정문과 옆 행각은 보물 81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근 정 문(勤 政 門)(보물 812호)
그 조정(朝廷) 북쪽 가운데 위풍도 당당한 근정전이 2층 
지붕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조정에는 신분을 가르키는 
품계석이 나란이 두줄로 줄지어 있었으며(동반은 문반
이요,서반은 무반으로 문무반을 합쳐 양반이라고 함.
양반이라는 말은 이것에서 유래하였다 함)

근 정 전(勤 政 殿)

근정정 주위는 월대가 2단으로 꾸
며져 있었습니다. 위쪽 기단의 동
서남북계단 기둥에 청룡,백호,주
작,현무 가 자리잡고 다른 계단에
는 돌기둥 위에 12지신을 (개,돼
지는 없음)  조각하여 놓았고 월
대 네 모퉁이에는 이름도 분명치
않은 재미있는 돌짐승들로 꾸며 
놓았습니다. 이들 돌짐승들은 아
주 재미있게 조각된 것도 있으며 
이들을 어떤 이는 서수(瑞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그런데 주작인
지 닭인지 나로서는 구분하기 힘
듭니다.그러려니 해야죠.) 경복궁 
내에는 국보가 2점 있는데 그 중 
하나인 근정전을 자세히 살펴봅
시다.근정전은 2층으로 되어 있으
나 내부는 상 하층이 트인 형태로 
되어있고 정면 뒤쪽으로 용상이
자리잡고 그 뒤에 정교하게 조각 
 
월대 네 귀퉁이에 있는 서수(瑞獸)
된 삼면병풍(삼곡병;三曲屛)이 있으며 그 뒤로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  놓여 있습니다. 
용상 위로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로 된 지붕 모양의 닫집이 
설치 되어 있습니다. 
왕의 존엄을 드러내기 위한 갖가지 상징들이 표출되어 
있는 것이죠. 
특히 천장의 중앙부분에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
하고 있는데 이를 쌍용희주(雙龍戱珠)라 한답니다. 
용의 발가락이 7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 칠조룡(七爪龍)
은 황제를 상징한다 하네요. 
밖에는 솥이 근정전 양 끝에 있는데 이것도 왕을 상징 
한다는 군요. 솥있는 아래쪽에 드므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화마(火魔)가 드므속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제풀에 놀라 달아난다고 합니다. 
이 근정전은 행사 때나 이용하는 곳이지 생활하는 공간
이 아니므로 냉방장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첫째줄 왼쪽ㅡ천장의 칠조룡, 오른쪽ㅡ용 상,
둘째줄 왼쪽ㅡ왕의 층계인 답도,오른쪽ㅡ칠조룡

경복궁은 오래된 건물이 별로 없어 근정전(국보 223호)과 
경회루(국보 224호)만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근정전 뒤로 사정문이 있고 그 안에 사정전이 있는데 
이곳부터 내전 (內殿)에 속합니다. 
내전 중에 왕의 공식 집무실 즉 편전(便殿)이 사정전
입니다.

사 정 문(思 政 門)

왼쪽 사정전과 오른쪽 만춘전
사 정 전(思 政 殿)
 사정전 뒤로 향오문(嚮五門)이 나오는데 그문을 들어서면 
강녕전(康寧殿)이 나타납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곳 즉 연침(燕寢)이요,내전의 중심이 되
는 곳입니다. 
강 녕 전(康 寧 殿)
경복궁 중심축의 일직선 상에 배열된 건물 가운데 마지
막이 교태전 (交泰殿)인데 강년전 뒤 양의문(兩儀門)을 
지나면 나타납니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자 생활공간입니다.
즉 중궁전,중전(中殿)이지요. 
교태전의 특이한 점은 지붕 용마루가 없다는 점입니다. 
교태전은 강년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은 용
이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다른 용이 내려
누르면 안되기 때문에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 태 전(交 泰 殿)
>교태전 뒤로 아미산이라는 나즈막한 둔턱이 있는데 이는 
경회루 연못을 판 흙을 쌓아놓은 것으로 교태전의 후원으
로써,  돌로 단을 쌓고 나무와 꽃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윗단에는 굴뚝 네 기가 있는데 건물에 붙여 만들지않고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따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에는 여러 그림으로 꾸며놓아 훌륭한 
미술품으 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보물 811호로 지정되어 있지요.

교태전 뒤 아미산 굴뚝
경복궁에서 근정전 다음으로 유명한 경회루(慶會樓). 
이층 누마루집으로 돌기둥을 세우고 위층에 나무로 지었
습니다. 경회루는 왕이 외국 사신이나 신하들을 모아 
회를 베풀던 곳이 었습니다. 

경 회 루(慶 會 樓)
경회루 앞에는 수정전이 있는데 이는 과거 세종 때는 
왕과 신하들이 만나 학문을 연구하던 집현전이 아니었나 
합니다. 

수 정 전(修 政 殿)
그외 교태전 동북쪽에 자경전이 있는데 이 자경전은 대
비들의 숙소로 보물 809호로 지정되어 있고, 
자경전의 꽃무늬 담장으로 된 굴뚝이 또한 유명한데 벽면
을 십장생 무늬로 꾸며놓은 것이 꽃담의 조형미를 살려 조
선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 십장생굴뚝은 보물 810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자경전(慈慶殿)의 꽃무늬 담장(보물 810호)
경복궁 북쪽에 고종이 건청궁을 지어 기거하였는데 헐려 
없어지고 향원정만 남아 옛 정취를 풍기고 있으며, 
아직은 갈 수 없지만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버티
고 서 있습니다. 청와대 정문과 마주치기 대문에 
드나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향 원 정(香 遠 亭)
 이상으로 우리 근대사에서 제일 쓰라린 아픔을 지닌 조
선의 정궁을 대강 훑어 보았습니다. 
주인 잃은 궁전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감이 잡히십니까? 
궁궐 전체 모습이 정연한 비례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궁궐 
건축의 배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문에 촬영할 예정을 잡지않아 다른 일행들의 작
품을 양해하에 이용하였습니다. 
                                (200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