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북한)

북녘땅 개성(開城)을 찾아ㅡ1

야정(野停) 2007. 12. 26. 17:06

일반 서민이 개성을 관광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기에 마눌과 같이 여행할 수 있는 일요일을 택해 예약을 하였습 니다. 우리만 다녀오기 적적하여 친구들에게 연락하니 한 친구가 쉽게 허락하여 같이 가기로 하였지요. 기다린 끝에 다가온 12월 23일. 새벽 4시 10분에 기상하여 준비하고 5시 20분 집을 나온 후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인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으로 출 발하였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 갑자기 신분증 생각 이 나서 마눌에게 물으니 안가져 왔다네요. 요. 이런 난감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5시 40분까지 약속 장소로 가야 하는데... 방법이 있겠거니 하고 그냥 셔틀버스가 서있는 곳으로 갔 습니다. 자초 지종을 버스 기사에게 말하였더니 난감해 하 면서 그냥 가 보잡니다. 계동에서 5시 55분 출발. 자유로를 택해 임진각역(개인 출발자는 이곳 주차장에 파 킹하여야 함)지나서 통일교를 통과하고 남측 출입국 사무 소(남측 CIQ)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셔틀버스가 개성까지 들어간다고 하네요. 모두 11대로 편성되어... 서울에서 남측 출입국사무소까지 가는 셔틀버스는 1인당 왕복 5000원씩 합니다. 그리고 개성 관광비는 18만원. 그 중 10만원은 점식식사비 포함하여 북측에 지불하는 금 액이라 들었습니다. 8시까지 출국수속을 하여야 합니다. CIQ에 들어가 여권과 비슷한 사진이 붙어 있는 명찰을 받 아들고 뒤에 신분증을 끼어 넣습니다. 신분증이 없는 마눌은 내가 보증하여 간단한 서류를 만들어 명찰케이스 뒤에 넣으니 걱정 끝. 출국심사에 이어 짐 검 사 끝내고 각조로 편성된 차에 승차합니다. 우리는 6조에 편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승차 하였으 나 도열한 차량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네요. 출발시간이 8시로 정해 있어서 그런답니다. 8시 출발. 15분 후 북측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하여 휴대하고 있던 짐 을 모두 들고 내려 건물로 들어가 입국 수속합니다. 대략 500여 명이 수속을 하고 있으니 시간이 꽤 걸립니다. 8시 40분 출발. 역시 기다렸다가 같이 출발합니다. 앞 뒤로 경호차가 에스코트하면서... 개성공단을 지나고 개성 시가지를 거쳐 개성ㅡ평양간 고속 도로로 들어섭니다.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하지만 우리 일반 도로 만도 못하고, 또한 시가지나 고속도로에 차량이라고는 구경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공단에 현대 아산 버스 여러대와 군데군데 현대 아산 자가 용이 가끔 보일 뿐. 주민들은 주로 자전거로 활동하거나 걷거나 합니다. 주택들은 기와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상점들은 쇼윈도가 없는 스타일로 대문같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형태입니다. 주민들이 길에 많이 다니고 있고 여러 사람 들이 우리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오전 우선 박연폭포로 간다 하네요. 여기서 잠깐. 50여 년간 가보지 못한 멀고 멀었던 개성의 실제 거리는 얼마나 될까? 남측 CIQ에서 휴전선까지 2km, 휴전선에서 북측 CIQ까지 2km, 개성공단까지 1km, 개성 시내까지 8km, 토탈 13 km 이니 얼마나 가깝단 말입니까? 고속도로 왼쪽편에 만수산과 왕건묘, 공민왕능이 있다 하 는데 오늘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아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주위가 연능리(능들이 줄 지어 있다고 하여)라는 곳 인데 그 주위에 두문동과 두무동이 있다고 합니다. 두문동은 문과 계급의 사람들, 두무동은 무과계급의 사람 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모여 살았다는 거 아닙니까? 개성에서 27km 지점 박연리(朴淵里;송학산 뒷편)에 천마 산과 성거산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모여 연못(박연:朴淵) 을 이루고 있다가 그 밑으로 37m 떨어져 박연폭포를 이루 고 있습니다.

박 연 폭 포

박연폭포는 송도 삼절(조선 시대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 포로 개성의 뛰어난 세 존재를 이루는 말)의 하나로 설악 산 대승폭포, 금강산 구룡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로 손꼽힙니다. 대승이 88m, 구룡이 74m이니 길이로는 대승이 이기겠지 만 웅장함으로 치자면 금강산 구룡이 더 웅장하리라 생각 됩니다. 박연폭포는 높이 37m 넓이 1.5m로 이루어진 폭포로, 깎 아 지른 듯한 벼랑과 병풍처럼 둘러선 층암절벽에 안기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폭포 밑에 패인 못은 고모담이라 부릅니다. 고모담 왼쪽에는 용바위라 부르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다리 를 놓아 올라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용바위쪽에서 촬영한 박연폭포
그곳에는 황진이가 젖은 머리로 휘갈겨 써 놓았다는 이태 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폭포를 묘사한 대목을 초서로 새겨 놓았는데 웬만한 한학자 아니고는 알아보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내용인 즉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 의시은하 낙구천(疑視銀河 落九天) 물줄기 삼천자 밑으로 곧게 떨어지니 흡사 은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하네. 박연폭포는 북측 천연기념물 388호로 지정되어 있었습니 다. 폭포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에 범사정(泛斯亭)이란 정 자가 있고 그곳을 지나 오르면 대흥산성(大興山城) 북문 에 다다르게 됩니다.

대 흥 산 성 북 문
그런데 범사정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범은 물에 뜨는 뜻의 뜰범이요,사는 이것이라는 이사자인데 무슨 뜻인지? 대흥산성 북문을 통과하니 박연폭포의 기원인 박연으로 가 는 길이 보입니다. 박연에는 솔직히 박아지같은 느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물웅덩이 정도 느낌이었죠. 그런데 그 웅덩이 안에 큰 바위가 하나 앉아 있더군요.

박 연
박연에 눈도장 찍고 800여 m 떨어진 관음사 쪽으로... 계곡 옆으로 오솔길 따라 오릅니다. 주위 폋폋한 돌마다 왜 그렇게 이름들을 많이 새겨 놓았는지? 우리 민족은 이상하리 만치 돌에 글을 새겨놓는 것을 좋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 석자 새겨놓은 곳이 너무나 많으 니 그것도 공해같은 느낌. 게다가 붉은 글씨를 많이 쓰는 북쪽 사람들이 그곳에 더 보 태 놓았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풍화로 희미해진 것,굵은 글씨,흐린 글씨, 정말 어지럽고 신경 쓰여 마음이 찌부둥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습니다. 산 중턱에 위치한 관음사. 서기 970년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는 대리석 불상 이 대웅전 옆 관음굴에 쌍으로 서 있었는데 하나는 평양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지금은 하나만 덩그라니 모셔져 있었습니다. 북측 국보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대리석 관 세 음 보 살 상
옆에 있는 대웅전은 1393년 이성계가 확장하였으나 임진 왜란때 불타 없어졌었고, 다시 인조때 복원하여 전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건축 연대가 짧아서 인지 보무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 웅 전
내부 불상은 1646년 조선시대 작품 그대로 라고 하네요. 대웅전 뒷쪽에 문이 두짝 있는데 한짝은 조각되어 있고 다 른 한짝은 조각하다가 중단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왼쪽은 조각되어 있는 것이고 오른쪽은 안된 것임
여기에 전해오는 이야기. "운나"라는 어린 소년이 조각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편 찮으시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빨리 끝내야 하는 감독관은 운나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소년의 어머니가 기어히 운명하셨다는 말을 들은 소년은 자기의 작은 재주때문에 너무나 큰 불효 를 저지른 것이라 생각하고 손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조각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였다고 하 네요. 대웅전에는 많은 관광객이 미화로 시주하고 있었고, 또한 그곳의 스님이 옆에 서 있는데 머리를 기른 것이 무척 어 색하게 보였습니다.

스 님

천마산을 배경으로 조화를 이룬 칠층석탑을 대웅전 윗뜰에서 촬영
관음사를 뒤로 하고 다시 박연폭포 주차장으로 하산합니다. 중간에 화장실을 들렸는데 화장실 내에 난로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관찰하니 연료는 나무를 사용하였고 수세식으로 흐 르는 물이 얼가봐 난로에 불을 지폈더군요.

오전 관광은 끝내고 시내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한다네요. 송악산을 왼쪽으로 보면서 고속도로를 지납니다. 송악산은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였다고 하기에 자세히 보니 역시 얼굴 모습, 목, 가슴 등이 선명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관광지 외에 주민이나 건물들을 절대 촬영해 서는 안된다고 하여 보여드리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이상으로 줄이고 점심식사를 하면서 2편을 소개하겠습니다. (2007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