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보조국사 체징(體澄)이 일으킨 가지산문 보림사(寶林寺)

야정(野停) 2008. 12. 4. 20:17
나주에서 장흥으로 23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장흥 유치
면의 탐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가지산(迦智山) 봉덕리 기
슭에서 아늑한 한 가람을 만나게 된다. 
송광사의 말사이며 통일신라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체
징(體澄)이 중창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제일 먼저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연 이곳 보림사(寶林寺).

보림사보다 먼저 구산선문에 대해 알아 보자. 불교가 두개의 종파로 갈라 지는데 교종은 교리에 의거 한 가르침으로, 선종은 참선을 행하여 마음으로 터득한 다는 가르침을 주는 종파를 말한다. 중국에서 달마대사가 일으킨 선종은 신라때 도의선사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염거화상에게 전수시키고 그 밑으로 여러 명의 제자들이 각기 다른 절로 가서 선을 모태로 전파하는데 그 때 9개의 절에서 선종을 일으켰고 이를 구산선문이라 한다. 그 중 체징은 가지산 보림사에서 후학을 기르고 선풍을 일으키니 이곳을 가지산문이라 한다. 삼국유사를 쓴 일 연스님도 가지산문 출신이라고 한다. 보림사는 체징이후 여러 차례 중수와 중창을 거쳐 대 사 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에 있는 공산군 유격대가 이곳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 해 봄 군경토벌대가 공비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렀다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아늑한 분지에 지어진 보림사. 동양 3대 보림(중국,인도, 한국)의 하나로 우리나라 선 종이 제일 먼저 들어온 선종 종찰(禪宗 宗刹). 금계포란형 지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신라 원표대덕 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사는 못에 용 아홉마리가 있어 살기 힘들다고 호 소하였단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가고 유독 백룡은 끝까지 버텼다나.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 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 갔단다. 이때 용꼬리에 맞아 패인 자리가 용소(용문소) 가 되었으며 그 후 못 자리를 메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아무튼 보림사 주변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고 한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 리, 용소, 녹룡리 등 창건 설화에서 토속 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심했음을 보여 준다. 일주문 지나 외호문. 경내 울타리가 감싸고 있는 첫째 문이다. 외호문에서 20여 m 앞에 사천왕문.

사천왕문을 들어 서면 오른쪽에 다문천왕, 지국천왕, 왼 쪽에 증장천왕, 광목천왕이 갑옷을 입고 각기 다른 상징 물을 들고 있었다.

사진 왼쪽이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 오른쪽이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사진 왼쪽이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오른쪽이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6.25때 불타지 않아 천왕문에 걸친 목판과 사천왕상의 복장에서 나온 중창 불사 기록에 의해 중종 10년에 조 성되고 2차례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 사천왕상 가운 데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것으 로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 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유물적 가치 때문인지 보물 125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보림사는 특이하게도 사천왕상 앞에 작은 목조상이 양쪽 으로 하나씩 둘이 있는데 이는 사천왕문을 열 때 문 앞 으로 튀어 나오게 만든 금강상이라는데 절을 찾는 아낙 들이 너무 놀라 낙태까지 하는 반작용이 일어나 할 수없 이 제거하여 옆에 있는 사천왕 앞에 세워 놓았다고 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40여 m 앞에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사천왕문과 대적광전 사이, 대적광전 앞에 삼층석탑 두 개가 나란히 서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있는데 통일 신라 시대에 세워진 두 탑의 규모와 양식이 거의 동일하나 상륜부 보륜에서 남탑은 3륜, 북탑은 5륜으로 되어 있는 것이 차이,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고 추측할 뿐이란다. 해체 보수시 발견된 탑지(塔誌)에 870년 경문왕이 선왕 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다 한다. 세 가지 합쳐 국보 4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대적광전 안에는 철제 비로자나불좌상이 안치되어 있었 다. 크기가 273m로 왼쪽 팔 뒤에 제조된 기록이 있어 조성연대가 확실한 불상이라 한다.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되고 국보 117호로 지정되어 있었 다. 삼층석탑 앞쪽에 멧돌같은 구멍 뚫린 돌이 양쪽에 마주 보며 땅에 박혀 있는데 이는 큰 법회 때 탱화를 걸 어 놓기 위한 설치물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에서 오른쪽에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이 있었다. 전에 있던 대웅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6.25 때 불타 다시 지었기 때문에 국보에서 해제되었다. 그곳에도 규모가 작은 탱화를 거는 돌덩이가 땅에 마주 보며 박혀 있었다.

보림사 형태를 보니 과거에는 대적광전이 주불전이었으나 중수하는 과정에서 대웅전을 다시 짓고 주불전으로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웅전 옆에 지장전. 그 뒤로 나즈막한 언덕에 보조국사 창성탑비가 있다.

보조국사 체징의 탑비로 비문과 이수, 귀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불에 타지 않고 도굴할 물건도 없고 덩치가 크니 다행히 안전하게 보존될 수 밖에... 탑비의 내용에 보조선사는 804년에 태어나 880년에 타 계했음을 알수 있고 부도는 880년에, 탑비는 884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창성탑비는 보물 158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위에 보조선사 창성탑.

팔각원당형으로 축조되어 보물 157호로 지정된 부도다. 중대석이 전체 균형에 비해 알맞지 않게 작은 듯한데 이를 커버하기라도 하듯 배흘림으로 만들었고, 그 중대 석에 안상(眼象;눈모양)을 2중으로 조각하여 놓은 것이 특이하였으며, 탑신부의 사천왕상은 조각이 정교하고 섬 세하여 통일신라 시대의 조각 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대석 받침의 구름 모양은 깊게 조각된 모습이 굵은 실타래를 두른 듯, 뭉게 구름 피어 나듯 실체감이 감돈다. 그러나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 워 보인다. 지붕돌이 다른 질감으로 사용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한다. 창성탑비 위 뒷산에 차밭이 있어 스 님들이 직접 작설차를 만들어 드시고 그 작설차가 유명한 특산품으로 전하고 있다 한다. 뒷산의 비자나무 숲. 고산 윤선도가 생활하던 녹우당(綠雨堂) 뒷산에 있는 비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다하 여 녹우당이라 당호를 지었다는 그 비자나무가 이 보림 사 뒷산에도 푸르게 뒤덮혀 있었다. 보림사는 국보를 2점, 보물은 위에 설명한 3점, 나머지 는 서부도, 동부도, 사천왕상 복장에서 나온 고서류 3 점으로 합하여 8점을 보유하고 있는 귀한 가람이다. 절마당 가운데에서 약수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1980년 한국자연보호 협회에서 한국의 명수로 지정할 정도로 물맛이 깨끗하고 담백하여 약수보다는 샘물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 아닐지? 약수 한 모금 마신 후 보림사 일주문을 나선다. (2008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