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고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백제 문화권을 안 다녀온 사람
이 별로 없건만 나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제인문화탐방회에서 백제 문화권인 공주와 부여
를 탐방한다 하기에 제일 먼저 따라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신라에 대해서는 승자의 역사라 많은 부분을
알고 있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것이 사
실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고찰하여 보자면
백제는 도읍지에 따라 3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 위례성시대(B.C 18∼A.D 475)와
둘째 웅진성시대(A.D 475∼538)
세째 사비성시대(A.D 538∼660)로 나눌 수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위례성, 공주에서는 웅진성, 부여에서는
사비성이라는 궁성을 쌓고 백제라는 국가가 번성하였었다.
우리는 보통 백제를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정하였던 나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백제의 3분의 2는 서울 위례성에
읍을 정하고 성하였던 나라이다.
그러나 오늘은 웅진성과 사비성을 탐구하는 날.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위례성은 함락되고 백
제 21대 개로왕은 피살된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할
수없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다.
위례성은 초기 국가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고 또한 유물
보전이 제대로 되지않아 그 흔적이 미미하나 63년 동안 도
읍을 정하였던 웅진성에서는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 인해
웅진성시대 백제의 역사적 비밀이 벗겨지게 된다.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 왕 중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것이
처음인데다가 국보급 유물이 한꺼번에 많이 쏟아져 나왔다
고 한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묘지석(국보 163호),무
덤을 지키는 동물 진묘수(鎭墓獸)(국보 162호), 왕과 왕
비의 금제 관장식(국보 154∼155호) 등 4600여 점의 유물
이 나왔고 국보급 유물이 17점이나 포함되었다고 한다.
공주에 도착하여 사적 13호인 송산리 고분을 먼저 관찰한다.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고분군은 그냥 겉으로만 보고 무령왕
릉의 내부를 모형관을 만들어 관람시킨다.
무 령 왕 릉
무 령 왕 릉 모 형 관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분(塼築墳)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방
무령왕의 방 내부
관람이 끝나고 바로 옆 산기슭에 있는 공주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1층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한다고 한다.
1. 무령왕 금제관식(국보 154호)
2. 무령왕비 금제관식(국보 155호)
3.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156호)
4. 무령왕비 금귀걸이(국보 157호)
5. 무령왕비 금목걸이(국보 158호)
6. 무령왕 금제 뒤꽂이(국보 159호)
7. 무령왕비 은팔찌(국보 160호)
팔찌 안쪽에 글이 새겨 있는데 만든 사람 이름과 무게가 쓰
여있다고 한다. 윤곽이 깔끔하고 증후하여 금제가 아닌데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8.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국보 161호)
9. 석수(국보 162호)
10. 지석(국보 163호)
11. 무령왕비 베개(국보 164호)
12. 무령왕 발받침(국보165호)
점심 식사 후 공산성으로 갔다.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이 붙잡혀 죽자 22대 문주왕이 즉위하여 웅진성으로
천도하였다고 위에서 기술하였다.
이곳 웅진성이 공산성으로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
대 동성왕, 25대 무령왕, 26대 성왕 초기까지 63년간 도읍
으로 이용되던 공산성.
서문 누각인 금서루
사적 12호로 웅진성 혹은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포곡형(包谷型) 산성으로 정상부에 연못터와 누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식수원인 우물터
궁 궐 터
또한 정상에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던 인조는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후에 관찰사로 부임한 이항로가 옛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정자
를 지어 쌍수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나.
쌍 수 정
공산성을 뒤로 하고 부여로...
(2010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