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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숨결을 찾아 다시 부여로

야정(野停) 2010. 12. 3. 16:23
한달 전에 백제 문화권인 부여를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다
시 또 다녀 올 기회가 생겨 집을 나섰다.
집합장소에서 버스를 타고 대략 2시간 만에 부여에 도착한
다. 부여군에서 야심적으로 건설한 사비궁을 먼저 관람하는
것으로 테이프를 끊는다. 사비궁은 정양문을 정문으로 해서
들어서면 넓은 뜰에 백제가 최고로 자랑하는 금동대향로를
만난다. 향로를 지나 2층으로 된 천정문을 통해 정전에 들 
어서니 2층으로 된 천정전(天政殿)이 우리를 향해 버티고 
서있다. 

정 양 문

천 정 전
정양문이나 천정문이나 천정전의 형태가 모두 비듯한 것 같고 정전을 둘러쌓고 있는 행각이라든가 모든 것이 조선 의 행궁을 많이 닮고 있다. 어떤 문헌에 의해 이렇게 조 성하였는지 조금은 의아해 한다. 일본에 백제 문화가 많이 전파되어 거꾸로 일본에서 많은 것을 고증하였다 하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오른쪽에는 능산리 고분군을 재현해 놓고 그 앞에 능사라는 절을 짓고 또한 그 앞으로 능사 오층목탑을 재현해 놓았다.

능 사 오 층 목 탑
목탑 심초석에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이 발 견되어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재현해 놓았고 상륜부는 금으로 도금시켜 놓았는데 그 금값이 지 금 시세로도 5∼6억은 되리라고 한단다. 또한 창왕명석조사리감은 국보 288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능사에서 나와 궁을 가로 질러 반대쪽으로 가면 민가들이 나타난다. 귀족이나 서민들의 민가를 지어 놓았고,그 위쪽 으로 토담과 볏집으로 만들어 놓은 위례성이 나타난다. 초라한 위례성을 한바퀴 돌아 궁을 나선다.

위 례 성
궁을 나와 오른쪽에 있는 백제역사문화관을 잠시 들렸다.

백 제 역 사 문 화 관
특별한 유물은 없고 당시의 생활상이나 목탑의 건축방법 등 을 소개한 수준이다. 이런 것들을 보여주자고 이렇게 웅장 한 건물을 지어 국고를 낭비하는 것 같아 안타갑기 그지없 다. 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관람하였을 때 너무나 한심 하여 한탄하였었는데 이곳도 역시 돈 쓰기 위한 행정이 아 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좁은 바닥에 무슨 박물관이 그렇게 많은가?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도 조금은 썰렁해 보이는데 국 립부여박물관이 있고 정림사지박물관, 또한 이곳에 있는 백 제 역사문화관 등 정말 한심한 행정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식견이 부족해 그런지는 모르지만 정말 볼 것도 없는 껍데기 건물... 인건비, 난방비가 아깝다.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창 왕명석조사리감(국보288호)이나 따로 소개해야겠다. 먼저 금동대향로에 대해 관찰하여 보자. 뚜껑에는 16인의 인물상과 39마리의 동물, 산, 시내, 호수 등 변화무쌍한 풍경을 조각하였고 뚜껑꼭대기는 봉황으로,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에 26마리의 동물을 새겨 놓았으며 또한 밑부분은 고개를 하늘로 치솟듯 떠받고 있는 용으로 되어 있다. 그 옛날 이렇게 섬세하게, 균형있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다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백 제 금 동 대 향 로(국보 287호)
창왕명석조사리감은 27대 위덕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 한 아버지 성왕(26대)을 위해 세운 능사의 축조연대와 발 원자가 새겨진 화강암으로 된 사리감으로 제조연대가 뚜렸 하고 1500여 년 이상된 사리감이라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 나 생각된다.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국보 288호)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이 부여에서 출토되어 부여국립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으나 우리는 부여국립박물관을 가지않으니 여기에 맛배기로 소개하는 것이다. 사비궁을 나와 점심식사를 마치고 부소산성(扶蘇山城)으로 향했다.

부 소 산 문(扶蘇山門)
먼저번에도 다녀갔지만 부여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니 다시 한번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백제의 3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삼 충사를 들른 다음 산성을 돌아 낙화정 있는 곳으로...

3 충 신 영 정(성충, 흥수, 계백)

백 화 정(百花亭)

낙화암 위에서 백마강을 가리키며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다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다
망국의 한을 원통해하며 피눈물을 흘리며 낙화암에서 몸을 날렸던 원혼을 달래줄 여유도 없이 고란사로 발길을 돌린 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는 극락보전에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는데 이곳 관세음보살은 흰색 으로 칠하여져 있었다. 어차피 고란사는 망국이 된 백제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 어진 절이라 관세음보살을 희게 표현해 백제 여인들의 원 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고 란 사(皐蘭寺)

흰색의 관세음보살
고란사 뒤 고란정에서 약수 한잔 마시고 암벽 사이에 기생 하는 고란초를 찾아 보았다. 바위 틈새에 몇 그루 눈에 들 어 온다. 고사리목 고란초과 식물인 고란초는 고사리 같이 잎 뒤에 포를 형성하여 번식하는 식물이다. 이곳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다른 지방에서 발견되는 것 이 더 실하고 많이 퍼져 있다고 한다.

조 룡 대(釣龍垈 ;소정방이 낚시하던 곳)
다시 황포돗배를 타고 구두레나루터까지 간다.

배를 타고 바라 본 낙화암

낙화암이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사비성이 축조된 다음 세워진 정 림사로 향한다. 지금은 오직 오층석탑과 석불좌상만 남아있는 곳이지만 백 제가 사비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국가 사찰인 것이다. 이곳에 있는 오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제일 오래 된 것으로 국보 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9호)
도읍이 결정되면 통치수단으로 종교의 힘을 빌리는데 사비 성으로 도읍을 옮긴 백제는 백성의 힘을 한곳으로 응집시 키기 위해 정림사를 세웠다고 생각된다. 오층석탑 옥개석은 얇고 넓게 퍼져있으나 탑신은 좀 작은 듯, 탑을 위에서 아래로 압축시킨 듯 균형미가 눌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옥개석 끝이 살짝 들려 다층 누각 목조 건물을 보 는 것같은 훌륭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1층 탑신부에 당 나라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라 즉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였다 라고 써 놓았으니 당 시 수난의 흔적이 1500여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석탑 뒤쪽 목조 건물 안에는 석불좌상이 하나 있다. 대좌는 비교적 섬세하고 단정하고 균형있게 조각되어 있으 나 석불은 일그러지고 마모되어 볼 품이 없건만 이를 어째 보물 108호로 지정되어 있는지 의아해 진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풍화되어 이렇게 된 것인가 본데 너무 심한 것 같다. 또한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108호)
정림사지 박물관에 들어갔다. 먼저 기술하였지만 무엇때문에 이 큰 건물을 지었는지? 정림사에서 출토된 깨진 기와장 몇 개 놓고 과거 생활상이 나 건물 축조과정을 만들어 놓은 한심스러운 전시장. 누가 건축하였는지, 누가 이런 곳을 관람하는지 울분을 금 할 길 없다. 내가 울분을 토한들 그 누가 알아주랴마는 씁 씁한 마음을 가다듬고 부여의 역사와 문화관광의 끝을 맺을 까 한다. (2010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