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여강에서 성도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성도에 서 유명하다는 문수원(文殊院)을 방문한다.
문수원 입구에 있는 포대화상
문수원의 산문(山門)인 천왕전(天王殿)에 들어선다. 대문을 넘으니 미륵불이 배꼽을 드러 내놓고 미소를 짓는다. 우리가 아는 포대화상이다. 사람들이 포대화상을 미륵불이라 칭한다. 포대화상과 눈 인사하고 지나니 양 옆으로 사천왕상이 버티 고 있다. 우리 것보다 조금 인자해 보이기는 하나 양쪽으로 세 명씩 세워 놓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나라 절에는 2명씩 4명인데... 이 사찰의 주지였던 자독해월(慈篤海月)스님이 이곳에서 수 행하고 영험을 얻어 문수보살의 화신이 되었단다. 당, 송 이후 명인들의 서화를 500여 점 보존하고 있으며 국 보급이 300여 점 된단다. 다음으로 삼대사전(三大士殿)이 있는데 혹 관음전이라 부르 기도 한단다.
삼대사전 전각에 쓰여진 문수원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인 삼대사를 모신 전각이다. 우리나 라 절은 전각 후면 밖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는데 중국은 전 각마다 후면 밖에 불상을 안치하였다. 삼대사전 후면에도 위타보살(韋馱보살)이라는 보살상을 감실 안에 청동으로 주조하여 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모시 지않는 보살이다. 불법을 보호하고 악마를 몰아내는 호법보살 이란다. 삼대사전 뒤로 대웅보전이 있는데 이곳 대웅전만 불 당 출입을 통제하느라 펜스를 쳐놓았다.
대 웅 보 전
대웅전 뒤로 설법당이 있고, 설법당 뒤로 장경루가 있는데 장경루는 윗층에 경전 등을 저장하고 아래층은 불사활동을 수행하는 곳이란다. 장경루에는 당나라 때 현장법사의 두개골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한다. 사찰 전각들의 배치에서 중국과 우리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문수원 뒷뜰에 세워진 나무화석
우리는 여러 전각들을 중앙으로 지난 다음 광장을 만들어 중 심 전각과 부수 전각들을 돌려 짓는 형태인데 중국은 배열로 전각을 짓는 것 같았다. 문수원을 나와 두보초당으로 향한다.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거의 3년간 이곳에 머물며 270여 편의 시를 썼다는 곳으로 전국 중심문물보호지 로 지정되어 있었다.
두 보 초 당
정문을 들어서면 시사당(詩史堂)이 있어 그 진열실에는 각국 의 말로 번역된 시집 번역본이 있다.
초가집을 지어 두보가 거처하던 곳이라 하고 옛날에 정말 두 보가 살았던 집터를 발굴하여 놓았다.
만들어놓은 초가집
공부사라는 곳에 중국의 유명한 시성들의 석상이나 소상들이 도열해 있다. 중국 4대 시성 이백, 두보, 백거이, 왕유도 있고 도연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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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꾸며진 정원을 돌아나와 촉한 유비의 재사 제갈량의 사당 인 무후사로 향한다. 이곳은 원래 유비의 묘인 혜릉 즉 한소열묘라 불렀는데 후세 사람들이 유비의 묘 옆에 제갈량의 덕을 기리기위해 무후사 를 세웠다고 한다. 사람들이 신하인 제갈량을 황제인 유비보다 더 높이 받들게 된 것이다. 한소열묘 현판이 있는 입구를 지나면 그 유명한 당비(唐碑)가 있는데 이는 당나라 때 세운 "촉승상 제갈무후 사당비(蜀丞 相 諸葛武候 祀堂碑)로써 문장, 서법, 조각이 모두 뛰어나 삼절비(三絶碑)라 부른단다.
당 비(唐 碑)
이곳에서 명량천고(明良天古)(임금은 밝고 신하는 착하여 천 고에 수범이 된다)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지나면 3m 크기의 유비상이 자리잡은 유비전이 나타난다.
명량천고라고 씌여진 유비전
명(明)자 중 날일변을 눈목변으로 표시한 것은 인지(人智) 의 밝음을 표시하느라 일부러 그렇게 썼다고 한다. 유비전의 유비상 양 옆에 유선과 손자 유심이 있었으나 언 제부터 인가 유선의 상은 없어졌다고 한다. 유심은 자살을 택하였으면서도 항복은 하지 않았지마는 유선 은 항복하였기에 기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란다. 좌우의 회랑에는 문무백관들의 입상이나 좌상을 배치하였으 며 송나라 때 악비의 친필로 쓴 제갈량의 전출사표, 후출사 표가 회랑벽에 새겨져 있다.
전 출 사 표
이는 유비가 죽은 후 후주 유선을 보필하여 오나라와 손잡고 위와 싸우기 위해 출전할 때 올린 글로써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천고의 명문이란다. 지금 회랑에 새겨진 글도 처음에는 정자로 썼으나 나중에는 흘겨 썼다고 한다. 이는 악비도 슬퍼서 제대로 쓸 수가 없 어서 그랬다나 어쨌다나. 이곳을 전체적으로 무후사라 하였지만 그래도 제갈량의 상은 유비상보다 작게 만들어 놓았다.
무 후 사
공명상 옆에 제갈고라고 불리우는 북 즉 동고(銅鼓)가 있다. 제갈량의 전각에는 명수우주(名垂宇宙;이름이 우주에 길이 빛난다는 뜻이 아닐까?)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명 수 우 주(名 垂 宇 宙)
제갈량의 상이 있는 전각 뒤로 유비의 혜릉이 있는데 봉우리 위로 나무들이 무성하여 능이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중국 제왕 중 제일 작은 능이라 한다.
한 소 열 묘 ( 혜 릉 )
이곳 무후사에서 당비, 출사표, 동고가 우리로 이야기하면 문화재감이다. 무후사 옆으로 나오니 공명원(孔明院)이라는 정원이 있고 그 앞으로 삼의묘(蔘義廟)라는 사당이 있다.
공 명 원
삼 의 묘
도원 결의를 한 유비와 관우, 장비를 기리는 곳이다. 공원을 벗어나면 바로 건너 금리(錦里)거리로 나서게 된다. 삼국시대 거리 모습을 재현해놓은 전통거리로 골목 사이 사이 로 전통기념품을 판매하고 여러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으 로 많은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다.
금 리 거 리
금 리 거 리
이것으로 시내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 후 성도의 명물 변검 을 관람하기로 한다. 변검은 성도에서 벌이는 쇼로 항주의 송성가무쇼, 서안의 장한가와 더불어 중국 4대 쇼 중 하나라 한다.
변 검 (變 劍) 쇼
관람을 끝으로 12시 20분 인천행 비행기를 타러 성도 공항 으로 향한다. 성도는 5년 전에도 다녀갔지만 분지에 형성된 곡창지대임에 틀림없는 곳이다. (2012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