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 밀 꽃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제고 졸업 40주년 기념으로 봉평을 거쳐 강능 오죽헌(烏
竹軒), 선교장(船橋莊)을 관찰하고 금강산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첫날 봉평에 있는 가산 이효석의 文學世界로 우리를 이우
용 동문이 이끌어 주었다.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대화장으로 떠나면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들리는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 붉은 대궁
의 향기를 맡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품어 보았던 성서
방네 처녀와의 물레방아간 로멘스...
1936년 "조광"에 발표되었던 "메밀꽃 필 무렵"을 우리는
다시 읊조리며 그 길과 그 장소를 지나본다.
이미 계절이 지나 메밀은 베어 없지만 다시 만들어 놓은
그때의 배경이나 물레방아는 아직도 우리들을 애잔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며, 또한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의 주인
공들이 (허생원 등)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
는 사람들이 있다.
허생원의 인생과 닮은 당나귀의 삶,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당나귀의 까스러진 갈기,개진개진한 눈,궁싯거리다, 칩칩
스럽다, 농탕치다.
모든 묘사가 시적인 산문으로 김동리가 소설을 배반한 소
설가라 칭하였다 한다.
36세에 요절한 가산의 소설속으로 몸과 마음이 늙어 메말
라진 우리들을 이끌었던 하루였다.
(2004년 10월)
이효석 생가 앞에서
이효석 기념관 앞에서
봉평 장터에서의 세 주인공 구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