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6시 기상.
일찍 준비하고 떠난다. 이 시골 어디에서 해장국을 먹을까
생각하다가 구례역으로 가기로...
구례역까지 11km 정도 되니 곧 도착한다.
구례역에서 올갱이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시간이 남을 것 같아 바로 조계산로 가지않고 화엄사를 먼저
들르기로 한다.
1. 백제 26대 성왕 22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창
건하였고 신라 27대 선덕왕 14년(645년) 자장율사가 부처
님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국보 4점과 보물 8점을 갖고 있는 화엄사를 들어가 보자.
화 엄 사 일 주 문
화엄사 입구에 들어서면 지리산 화엄사라는 현판이 붙은 불이
문(不二門)을 지난다. 절로 오르는 길은 폭이 3∼4m되고 길
이가 6∼7m 이상 되는 화강암으로 깔아놓았다.
이렇게 큰돌은 다듬기 어려웠을 텐데 그것도 여러 장 깔아
놓았으니 대단하다.
그 넓은 돌길을 밟고 조금 경사가 있는 길을 오르니 금강문.
금강장사가 문을 지키고 있다.
사천왕들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을 통과해 일직선 상에서 엇
갈린 곳에 있는 보제루를 지난다.
보제루 밑으로 지나지않고 옆으로 가도록 배치했다.
대웅전, 각황전이 있는 넓은 광장.
왼쪽에 서오층석탑, 오른쪽에 동오층석탑이 쌍을 이루어 버
티고 서있다.
서오층석탑은 보물 133호, 동오층석탑은 보물 132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서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보물 1348호
로 지정되어 있다.
서 오 층 석 탑
동 오 층 석 탑
정면에 서있는 대웅전은 보물 299호. 대웅전 삼신불탱화가
보물 1463호이다.
화엄사하면 각황전(覺皇殿)이 유명한데 각황전에는 석가모니
불을 주불로, 아미타불, 다보불을 협시불로 모시고 있고 대
웅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석가모니와 노사나불을 협시불
로 모신 삼신불(三身佛 ; 하나의 부처를 정신과 육신 그리고
수행으로 얻어진 부처) 형태를 하고 있다.
각 황 전(국보 67호)
각 황 전 앞에서
대 웅 전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것이 화엄종 사찰의 기본이다.
화엄사는 각황전을 먼저, 후에 대웅전을 지었기 때문에 주불
전이 둘같이 보인다. 처음에는 각황전 앞 쪽에서 절로 들어
오게 하였는데 대웅전이 지어 지면서 입구를 돌려 놓았단다.
또한 각황전이 대웅전보다 훨씬 크지만 보제루를 돌아서서 바
라보면 크기와 높이가 비슷하게 보인다.
각황전은 멀리 있고 대웅전은 가까이 있으니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 실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찰 건물 중 제일 큰 규모인 각황전. 깨달음은 얻은 왕이란
뜻으로 1703년 형조참판 이진휴가 쓴 글씨란다.
각황전이 국보 67호, 각황전 앞 석등이 국호 12호이다.
각 황 전 앞 석 등(국보 12호)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300호)
각황전 뒤로 가면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층계가 있는 데 108
계단이란다. 계단을 오르면 4사자 3층석탑이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인도에서 온 연기국사를 생각해 부처님의 진
신사리 73과를 봉안하였다 한다.
이곳을 효대(孝臺)라고 부르는데 연기(緣紀)조사가 어머니를
위해 차를 공양하고 있는 모습으로 석등을 받치고 있게 하였
단다.
4사자 3층석탑은 국보 35호로 지정되어 있다.
4사자 삼층석탑(국보35호)
국보 4점,보물 8점이 보관되어 있다는데 보물 한가지는 무엇
인지 모르겠다.
금강문 밖에 벽암의 탑비가 있다.
임진외란 때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
성하는 등 조선 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
게 공헌한 스님이시란다.
전란후 화엄사를 비롯해 해인사, 법주사 등의 중수를 주도하
여 조선 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한다.
벽암탑비의 받침돌이 연이란다.
다른 곳의 받침돌은 보통 귀부(거북이 받침돌)인데 이곳은
연으로 받침돌을 만들었다.
벽 암 탑 비
연(燕)은 거북과 흡사하며 이마에 외뿔이 있고 양날개를 가졌
으며 인도와 동남아 일대의 해안에 주로 서식하고 바다와 육
지를 자유 자재로 왕래하여 사람을 태우고 나르고 외뿔로 서
로 싸우는 가공의 짐승이다.
(2014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