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漢 山城에 대하여
우리가 제일 즐겨 산행하는 곳이 北漢山이건만 歷史的으 로 北漢山城이 어떠한 경로로 축조되었으며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아는 이가 별로 많지않다. 본인은 이를 안타까이 여겨 山城에 대한 숨은 이야기와 地名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지명에 대해 알아보자. 신라때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으나 負兒는 곧 불→ 뿔 →화(火) →화(華)로 변천되어 고려와 조선전기에는 華山이라고 불리어 졌고 負兒 -뿔 -角(각)으로 해서 세 봉우리(인수봉, 백운대, 만경대)로 이루어져 있기에 조 선시대에는 三角山이라고 불렀다. 다음 산성의 축성연대를 알아보자. 백제 4대 개루왕 5년에 산성을 쌓은 이래(당시는 重城 만 쌓았음. 외곽성 안쪽에 있는 성) 고려 시대로 와서 우왕때 왜구에 대한 방어책으로 최영장군을 보내 노적 봉울 중심으로 重興洞 石城을 수축하였다. 조선 14대 선조때에도 고려 8대 현종이 거란의 침입때 삼각산내 重興洞으로 피난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며 수축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대 숙종 37년에 와서 본격적으로 산성을 축성하기에 이르렀다. 축성에 동원된 백성을 三軍門(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으로 나누어 6개월에 걸쳐 축성하였는데 약 5만명이 고 생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숙종 37년 축성 당시 13개의 성문이 있었다. 대서문(大西門)으로 시작하여 왼쪽으로 水門, 西暗門, 北門, 白雲洞暗門(衛門;위문), 龍岩暗門(용암문),小東 門(현재의 대동문), 東暗門(현재의 輔國門;보국문), 대동문(현재 大成門), 小南門(현재 대남문), 靑水洞暗 門, 扶旺洞暗門(부왕동암문), 袈娑堂暗門(가사당암문) 이 완성되었으며 숙종 40년에는 重城 축조(13개의 성안 안에 또 쌓은 성)로 中城門, 尸柩門(시구문), 수문 등 3개의 문을 추가로 만들어 16개에 이르렀다. 이중 홍예형식을 한 문은 대서문, 북문, 대동문, 대성 문, 대남문, 중성문(현재 부르는 이름으로)으로 문루가 있었던 흔적으로 초석이 남아 있어서 몇 군데는 다시 문 루를 세웠다. 또한 모든 성문 출입구를 보면 내측이 외측보다 상당히 높고 넓게 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외부로 부터 문 짝의 고정 부분이나 틈을 보이지않게 하여 문짝을 보호 하기 위함이다. 또한 대남문 옆 보현봉에는 일찌기 무학대사가 한성 도 읍지의 지형을 살피기 위하여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음은 성곽 안을 들어가 보자. 성곽 안에 제일 중요한 것은 행궁인데 전란시 왕이 임 시로 피하기 위한 別宮으로 대남문에서 계곡을 따라 30 분 정도 내려가면 넓은 터가 있는데 여기는 上倉터이고 상창터에서 상원봉으로 100m 오르면 행궁터가 나온다. 행궁은 잘 보전되다가 1915년 집중호우로 유실되고 또 한 그때 중성의 수문, 외곽의(대서문 옆) 수문도 모두 유실 되었다고 한다. 또한 重興寺에 주둔중인 일본 헌병부대도 모두 유실되었 다고 한다. 그외 성을 축성하고 관리하는 三軍門의 유영이 있었는데 훈련도감(訓局), 禁衛營(금위영;금영), 御營(어영)의 터는 지도에서와 같이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또한 창고 터도 지도에서와 같다. 여러가지 문화재와 절, 부도, 유적 등이 있는데 이상 생략하고 다음부터 북한산행을 할때는 역사와 함께하는 산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맺을가 한다. 참고 문헌 조면구의 북한산성 (2003년 12월경 씀)
(중흥사는 거찰이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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