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서 퍼옴
이 달에는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을 산행하기로 하였 다. 나는 청량산을 세 번이나 다녀왔지만 최고봉도 가보 지 않았고 작년 가을에 착공한 구름다리도 가 보지않아 다시 따라 나선 것이다. 이상하리 만치 푸근하던 날씨였 는데 오늘 아침은 오랫만에 영하 3도나 된다고 한다. 44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7시 조금 넘어 삼 양동을 출발하였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광주지방을 지 나고 있었다. 차창에 비치는 주위 산들이 눈으로 하얗 게 덮혀 있다.우리 동네는 아무 것도 오지 않았는데 여 기만 축복을 주었단 말인가? 제법 쌓였는지 모두가 하얀 세상이다. 전달 밀양 재약 산에서는 눈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하얀 세상에서 산행할 수 있을런지? 부픈 가슴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얼마 지났느지 모르지만 여주 휴게소 들어 오면서 주위를 둘러 보니 하얀 세상이 갈회색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광주지방만 선택 받았던 모 양이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으니 그냥 잊어야지. 북어국에 밥 한술 퍼주기에 쌀쌀한 밖이 싫어 차로 들 고 들어와 요기를 하였다. 항상 회원들을 위해 요기꺼 리를 준비하여야 하는 회장단의 노고가 보통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봉화를 향해 출발한다.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영주, 봉화로 해서 청량산 도립공 원에 도착한다. 청량산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소에서 안내원이 나와 지 시하기를 위쪽 연화교에서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버스는 입구 앞에 있는 청량교 건너 주차장에서 대기하라고 한 다. 지금 위에 있는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자리가 없다 한다.우리는 주차장에서 내려 청량폭포 건너에 있 는 하청량이라는 곳에서 11시 30분에 산행하기 시작하 였다. 이곳은 장인봉(혹은 의상봉)까지 바로 올라가는 코스로 거리는 1.5km 정도 된다고 하는데 시작부터 완 전 곧추 선 바위같았다.
두들마을에 있는 폭포
경사도가 45도는 되리라 짐작된다. 두들마을까지는 30 ∼35도 정도로 그냥 오를만 하였으나 두들마을 지나서는 완전 45도. 이마에서는 구슬 땀이 계속 흐르고 등은 흠 뻑 젖어 주체할 수가 없다. 장인봉과 선학봉 중간 고개에서 왼쪽 장인봉으로 갔다 가 다시 내려와 선학봉으로 올라야 하는데 미리 힘을 많이 뺏는 바람에 장인봉을 포기하고 바로 선학봉을 택 한 회원이 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청량산 최고봉인 장인봉(870m;의상봉)을 다녀 오지 않고 청량산 갔다왔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고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략 300여 m 오르니 기어이 장인봉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장인봉이라는 글씨는 통일 신라 시대 유명한 명필가 해 동서성(海東書聖) 김생의 글씨로 집자해 놓았다고 한다. 표지석 뒷면은 이조 중기 때 유명한 성리학자 주세붕의 "정상에 올라"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한 20여 m 서쪽으로 내려가면 전망대가 있다. 이곳 전 망대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하며, 청량산 입구라든가, 건너 공민왕이 성을 쌓았던 축융봉을 관망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돌아와 장인봉을 거쳐 선학봉 쪽으로 갔다.
선학봉으로 올라 자란봉(795m)으로 가는 곳에 국내에 서는 제일 긴 산악 현수교량이 보인다. 길이 90m, 높 이 70m인 이 현수 교량은 작년에 완공하였는데 100여 명이 함께 올라 있어도 안전한 다리란다. 직각으로 솟 은 양쪽 두 봉우리를 연결시켜 놓은 것이 정말 장관이다.
이 현수교가 없었다면 무척 힘들게 양쪽 봉우리를 넘었 으리라. 다리를 건너니 우리 일행들이 오손 도손 모여 앉 아 식사를 하고 있다. 장인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선학 봉으로 온 일부 회원들이었다. 장인봉을 거쳐 온 일행 들은 다른 곳에 터를 잡고 간식거리를 풀었다. 식사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점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오늘 날씨가 저녁이 될수록 더 추워진다더니 그 영향인 지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부리나케 짐을 쌓 아 다음 코스로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시나브로 찾아드는 한기를 이겨내기가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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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가지않아 뒤실고개에 도착하니 일부 회원은 바로 청량사로 내려 간다고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회 원은 능선을 따라 연적봉(硯滴峰;벼루봉우리)으로... 연적봉 바로 옆에 탁필봉(卓筆峰;뛰어난 문장의 봉우리) 이 뾰죽하게 서서 우리를 막고 있다. 탁필봉 옆을 끼고 돌아 큰 바위를 또 도니 그 큰 바위가 바로 자소봉(紫 宵峰;보살봉)이다. 왼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무심코 따르다 보면 그냥 하산하기 십상 이나 조금 주위를 살펴 보면 왼쪽으로 봉우리를 오르는 사다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자소봉이란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자소봉에 자리한 소나무 정기를 받은 다음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 와야 된다. 이 봉우리는 원래 보살 봉이었으나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선생이 자소봉(붉은 기운이 도는 밤의 봉우리)이라 이름을 바꾸었고 탁필봉 도 중국 여산의 탁필봉 이름을 따다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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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산 능선을 따라 오면서 우리 눈에 자주 띄는 붉은 소나무, 소위 춘양목이라고 하는 놈은 어떤 것인 가, 알아 보는 것도 좋을 성 싶다. 강원도에 많은 금강 송은 속이 꽉 차 있고 수피가 얇은 나무로써 건축 자재 에 많이 이용되고 지금도 최고급 자재로 남대문 복원에 도 사용되는 나무이다. 그런데 봉화에서 생산되는 춘양목은 봉화군 춘양면과 소 천면 일대에서 자라는 금강송으로 일제 때 춘양역에서 반출되었다 하여 춘양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자소봉을 내려와 건너 봉우리를 넘으면 경일봉으로 돌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바로 김생굴쪽으로 방향을 틀어 하 산하기로 하였다. 대략 200m 내려와 삼거리에서 왼쪽 으로 방향을 틀어 계속 내려 간다. 김생굴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통일 신라시대 해동서성(海東書聖) 김생이 어렸을 때 수도하던 굴이었는데 길을 못찾고 그냥 청량정사(淸凉 精舍)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청량정사는 이퇴계선생의 숙부 송재 이우가 지은 집으 로 퇴계가 공부하던 곳이고 나중에는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청 량 정 사(淸 凉 精 舍)
안동 도산서원도 산 하나 넘으면 있을 정도로 지척이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청량가(淸凉 歌)라는 시조까지 지어 읊었다고 한다. 그 시조를 다시 적어 보면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훤사하랴 못 믿을 건 도화로다 도화야 뜨지마라 어주자 알가 하노라. *훤사하랴--속이지마라 *뜨지마라---떠나지마라 *어주자-----어부 우리는 청량정사 옆을 타고 다시 100여 m 올라가 금탑 봉 허리로 나 있는 길로 따라 갔다. 입석이라는 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이 길로 오르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거 꾸로 내려가는 것이다. 100여 m 가니 청량사가 제대로 한 눈에 들어 오는 길 목에 서게 된다. 어풍대(御風臺)라는 곳으로 중국의 사 상가 열어구(列御寇)가 보름동안 놀다 갔다고 하여 어풍 대라 한다고 한다. 또한 최치원이 수도하던 곳이기도 하고...
서 있는 곳이 어 풍 대 (御 風 臺)
바로 몇 걸음 지나 최치원이 이 샘물을 먹고 머리가 좋아 졌다고 하는 총명수를 만나게 된다. 우리도 한 잔씩 먹고 머리를 맑게 하고 싶었는데 불행하게도 샘이 말라 물이 없었다. 조금 더 금탑봉을 돌아가니 암자 하나 나타나 는데 이름하여 응진전(應眞殿).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건너편 축융봉에 산 성을 쌓고 피신하여 있을 때 노국공주는 이곳 응진전에 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애기를 갖게 해 달라고... 그리고는 16명의 나한들을 시녀들과 함께 손수 깎아 만 들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감탄하셨는지 기어이 노국공주는 임신을 하였 다지요. 그러나 나중에 난산으로 생명까지 잃었지만... 그러한 인연때문에 이곳은 나한기도처로 유명하단다.
응 진 전(2008년 4월에 촬영한 것)
응진전 뒤 넘어질 듯한 바위 밑에 감로수가 있어 찾으 니 물 한모금 겨우 받기가 쉽지 않다. 나눠서 입에 물 칠만 하고 돌아설 수 밖에... 이 감로수는 1초에 한방울씩 하루 30L 밖에 나지 않는 다고 한다.
감 로 수
응진전 뒤편 바위 위에는 움직이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옛날 한 스님이 절터를 찾아 다니다 이곳을 보고 기뻐 하였다나. 그런데 절 뒤 큰 바위 위에 건들거리는 바위 가 걱정이 되었단다. 힘이 센 이 스님 그곳으로 올라가 절벽 밑으로 굴리고 다음날 절터에 가 보았더니 어제 굴려 떨어 뜨린 바위가 제 자리에 올려져 있었단다. 기절 초풍할 수 밖에. 주변을 훑어 보니 가마니를 깔고 돌을 끌어 올린 흔적이 남아 있더란다. 사람들은 도깨비 짓이라고 하지만 스님 은 부처님이 절을 짓지 말라는 계시로 알고 절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의상대사는 건들바위가 위험하 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응진전을 지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건들바위 혹은 동풍석(動風石)이라 부르게 되 었는데 한 사람이 밀어도 건들거리지만 여럿이 밀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동 풍 석(動 風 石; 퍼 옴)
응진전 뒤에 있는 암벽
응진전을 뒤로 하고 다시 청량사로 갔다. 청량사 있는 곳을 내청량사라고 하고 응진전 있는 곳을 외청량사로 구분한다고 한다. 청량사는 약사불을 주불로 모시는 절이다. 주 불전은 유리광 세계를 관전하는 약사불이 안치된 유리광전으로 약사불을 주불로,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두 고 있다. 지장보살은 머리에 푸른 모자를 쓰고 있으며 가 부좌한 다른 부처들과 다르게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려 놓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약사불은 종이로 만 든 지불로써 금색을 입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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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지불이 몇 군데 있지만 이곳에 있는 지불은 조 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문화재위원회에 보물 지정을 의뢰해 놓은 상태라 한다. 유리보전 앞에 있는 소나무는 삼각우송이라 하는데 옛날 원효대사가 아래 마을을 지나는데 세개의 뿔을 가진 소 가 주인의 말을 조금도 듣지않아 일을 시킬수 없는 것을 보고 그 소를 시주하라고 하였다 한다. 농부는 흔쾌히 소를 시주하였다나. 원효대사는 그 소를 끌고 절로 와서 불사를 시키니 일을 너무 잘해 불사가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고 한다. 불사가 끝난 후 소가 죽자 지금 소나무 있는 자리에 묻 고 삼각우총이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소 나무 한 그루가 자라 가지가 셋으로 벌어지는 것을 보 고 그 소의 화신이라 믿고 삼각우송이라 이름지었다 한 다. 그리고 그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으리라고 믿었 다고 한다.
뒤에 있는 소나무가 삼 각 우 송
앞에 있는 5층 석탑은 지은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석가 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청량사를 뒤로 하고 절로 오르는 포장된 길로 내려가다 가 안심당이라는 찻집으로 발을 옮겼다. 산사에 곁들여진 고즈넉한 찻집 안심당에서 오늘의 피 로도 풀고 산을 벗하여 어짐도 깨우치고,오미자향에 취 해 마음을 새삼 정진하는 기회도 가져 보았다. p.s *어짐--너그러운 마음 하청량에서 장인봉까지 1.5km에 대략 1시간 30분, 장인봉에서 자소봉까지 2.2km에 대략 1시간 30분, 자소봉에서 청량사까지 1.3km에 대략 1시간, (그러나 응진전 다녀오면 약 40여분 더 소요) 청량사에서 봉화군 박물관 있는 주차장까지는 대략 1.8km 될 것 같음. (2009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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