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탐방

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

야정(野停) 2009. 2. 9. 16:48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으로 그 명성을 간직한 영남루는 보물 147호
로 지정되어 경남 밀양시 남천강가에 있는 누각으로 
옛날 객사의 부속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 다시 지어진 것으로 
귀한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구요.

원래 신라 법흥왕 때 세워진 영남사라는 절의 작은 누 각 자리에 1365년(공민왕 14년) 밀양부사 김주가 창건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이 거듭되었는데 1611년 (광해군 3년)에 객사를 영남루 북쪽에 지으면서부터 밀 양도호부 객사 소속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영남루 곳곳에 여러 현판이 걸려 있으며 영남루라 쓴 현판은 성파(星波) 하동주가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합니 다. 또한 고려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이 이 영남루에 대해 읊었던 시가 많이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영 남 루 옆에서

영 남 루 뒤

남 천 강
영남루에서 바라보니 남천강이 밀양시가지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어 마치 섬같이 보입니다. 강을 따라 공원도 만들고 분수, 야외무대까지 시민들의 휴식처로 잘 갖춰 져 있었습니다. 영남루 아래에는 아랑각(阿娘閣)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 선 명종 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 전설의 주 인공인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아랑은 당시 밀양부사의 딸로 윤동옥(尹東玉) 혹은 정 옥(貞玉)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어느날 유모를 따라 영남루로 달 구경을 갔다가 괴한의 협박을 받자 죽음으 로 순결을 지켰다 합니다. 그 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후일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정순아랑지비(貞純阿娘之 碑)라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아랑각이라 불렀답 니다. 지금의 아랑사(阿娘祠)은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3칸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중창하고 아 랑의 영정과 위패을 봉안하였다 합니다. 영남루 앞에는 천진궁(天眞宮)이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원래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拱 振館)의 부속건물로 사용하였으나 1722년 부터 공진관 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의 기능을 담당하였습니 다.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 용하였다고 하네요. 천진궁은 중앙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왼쪽 벽에 부 여, 고구려, 가야 시조왕과 고려 태조 위패를, 오른쪽 벽에 백제, 신라, 발해 고왕(高王), 조선 태조의 위패 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건축적 가치보다는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 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는 땅에 묻고 감 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해방 후 이를 복원하려 는 지역민의 노력으로 민족의 정통성 회복울 추구하고 자 하였던 지방민의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고 볼 수 있습니다. 건너편 언덕에는 사명대사상을 만들어 놓았고... 영남사 후문에서 산으로 돌아 오르면 무봉사(無鳳寺)라 는 절이 있는데 옛날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되었다고 합 니다. 그 무봉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대좌에 앉아 광배를 휘두루고 있는데 이름하여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광배 뒤에는 약사여래가 도드라지게 새겨 있었고 이것 은 경주 남산의 미륵곡 석불좌상에서 보이는 정도로 드 문 예라 하네요. 통일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물 493호로 지정 되어 있다 합니다. 영남루 후문 앞에는 친일 시비가 붙 었던 박시춘의 생가가 있어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계속 틀어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인 평양 부벽루는 언제 만나볼 수 있 을지? (2009년 1월 28일)